프로그램 글
김현탁
“김현탁은 우리 시대의 유일한 전위이다. 고유한 미학과 방법론을 지녔다는 점에서 ‘유일한’의 수식어는 과장이 아니다. 그의 이전 작품들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유일한 전위’에 동의하지는 못하더라도 ‘최고의 전위’라는 표현에는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텍스트를 해체하고 이미지를 중시하며 ‘생성’의 드라마를 추구하는 그의 미학은 20세기 초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아방가르드의 본고장에 유학을 다녀온 많은 해외파 연출가들 중 아방가르드의 역사성을 재구해내는 연출가가 희박한 현실을 볼 때, 자생적 아방가르드가 가능함을 증명한 김현탁의 고군분투는 기이하면서도 신통하다. […] 김현탁은 원작 텍스트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자가 아니라, 그것이 자신에게 무엇을 전해주었으며, 어떤 감흥을 일으켰는지, 그래서 궁극적으로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집요하게 탐구하는 자이다. 그는 텍스트를 해체하기보다는 생산하는 사람이고, 의미를 파괴하기보다는 집착하는 사람이다. 그가 해체시킨 원작 텍스트는 비어있는 공허가 아니라, 새로운 예술적 의미로 채워지는 역동적 생성의 공간이다. 파괴의 폐허를 볼 게 아니라, 그 빈 공간으로 육박해오는 생성의 소용돌이를 봐야 한다.”
백승무,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공연과 이론』 제56호 (2014): 267-268.
“김현탁의 작업을 고찰하는 것은 2000년대 이후 한국연극사 내부의 텍스트와 공연 사이의 길항적 관계를 성찰하는 작업이 될 수 있다.”
김기란, 「2000년대 한국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공연텍스트 구성 과정의 실증적 고찰 - 확장된 각색을 통한 무대 위의 글쓰기, 극단 성북동비둘기 김현탁의 연출 작업을 중심으로」, 『한국연극학』 제1권 56호 (2015): 243.
동시대 한국 연극계에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연출가 김현탁은 종종 폴란드의 거장 예지 그로토프스키(Jerzy Grotowski)에 비견된다. 무대 장치, 조명, 분장, 의상 등 외피를 덜어내고 연극의 본질에 집중하는 그의 작업이 그로토프스키의 이상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현탁은 단순히 덜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비워진 자리에 자신만의 언어를 채워 넣음으로써 고유한 예술 세계를 완성한다.
그 세계는 철저히 한 사람의 감각에서 출발한다. 김현탁은 공연의 컨셉을 구상하고 대본을 쓰며, 무대와 소품 설계, 의상과 음악 선택까지 모든 과정을 진두지휘한다. 공간의 밀도, 배우의 움직임, 빛과 소리의 결처럼 공연을 이루는 모든 층위가 한 사람의 판단 아래 조율된다. 그의 작업이 ‘창안·연출’로 표기되는 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공연의 모든 요소가 김현탁이라는 예술가만의 감각에서 발원한다는 선언이다.
일관된 조율은 텍스트를 다루는 방식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김현탁에게 원작은 받들어야 할 금과옥조가 아니라 공연을 위한 ‘재료’다. 〈천기누설 킹교인〉(2019)에서는 『오이디푸스 왕』의 운명과 자유의지라는 주제를, 〈걸리버스〉(2022)에서는 『걸리버 여행기』 1부의 소인국 설정을, 〈알바의 집, 배로나르다〉(2024, 2025)에서는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의 노동이라는 소재만을 차용한다. 원작을 재료 삼아 자유롭게 유희하는 그의 방식은 주로 해체와 재구성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 놀이의 목적은 파괴가 아니다. 김현탁에게 해체는 원작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경로이며 재구성은 본질을 현대적 감각으로 강화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서사는 해체되지만 핵심은 더욱 분명해지고 빈자리는 새로운 예술적 의미로 채워진다.
배우의 신체 또한 예술적 의미 생성의 핵심 재료로 활용된다. 〈세일즈맨의 죽음〉(2011)에서 윌리 로먼 역의 노배우는 공연 내내 트레드밀 위를 달리고, 〈걸리버스 2〉(2025)의 소녀는 커튼콜이 끝난 뒤에도 홀로 남아 체조를 지속한다. 고단한 몸이 뿜어내는 감각은 가감 없이 객석에 전달된다. 그로토프스키의 성스러운 배우가 자아를 비워 순수한 현존을 추구했다면, 김현탁의 생동하는 배우는 소진되는 몸을 통해 관객과 감각을 공유하며 그 공유 자체를 의미로 전환한다.
김현탁에게 관객은 초대된 손님이 아니라 공연을 완성하는 최후의 조건이다. 〈바이 사이클〉(2014)에서 관객이 직접 자전거 페달을 돌려 무대 조명을 밝히게 한 장치는 그의 신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페달을 밟지 않으면 무대는 어둠에 잠긴다. 공연이 지속되려면 관객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이 단순한 메커니즘은 관람을 참여로, 구경을 책임으로 치환하며 공동체의 존재 방식을 생각하게 한다. 김현탁의 무대에서 관객은 완성된 작품을 수용하는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조명을 밝히건 배우의 소진을 감각하건 현장에 있음으로써 공연의 에너지와 의미를 함께 만든다.
포스트드라마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원작의 핵심을 관통한다는 점에서 김현탁의 연극은 유일하다. 텍스트와 신체, 배우와 관객 사이의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내는 동시에, 연극을 구심점으로 단단히 쥐고 무한한 원심력으로 뻗어 나가는 전위의 정점. 최소의 형상으로 최대의 심연을 길어 올리는 이 집요한 분투는 결국 그로토프스키를 넘어 김현탁이 스스로 일궈낸 연극적 성소로 수렴한다.